[한백강연] 김개천 교수 'Lessl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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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8회 작성일 25-11-13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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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5년 7월 28일 /
장소 : 생각공장 지하1층 세미나실 /
'Lessless'
안녕하세요. 지난 7월 저희 한백건축은 ‘예술적 삶의 현대건축’을 주제로 열린
2025년 김개천 교수님의 마지막 강연을 통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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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우고 또 비운다. 덜어냄 조차 덜어낸다."
교수님은 건축이 ‘선 긋기’가 아니라 ‘선 지우기’에서 시작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완전한 비워냄. Lessless.
이번 강연을 통해 여백이야말로 삶을 담는 가장 큰 그릇이라는 메시지가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오래도록 울림을 남겼습니다.
Lessless 선 너머의 공간
비워냄이 드러낸 현대 예술의 새로운 인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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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Golconda, 1953)입니다.
그림 속 회색 하늘에서 쏟아지는 건 물방울이 아니라 검은 양복 차림의 ‘복제 인간’들 입니다.
신 대신 인간의 이성과 기술을 신뢰했던 근대는 새롭고 자유로운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으나 결과는 규격화된 군상뿐이었습니다.
결국 '새로운 인간,새로운 삶'이라는 꿈 대신 표정 없는 복제품을 쏟아낸 시대를 풍자한 작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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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설치물은 프랑스 개념미술가 다니엘 뷔랑(Daniel Buren) 의 〈Les Deux Plateaux〉(1985‑86)입니다.
클래식한 궁정 건축 사이에 검백 스트라이프만 반복해 ‘장식적 덧칠’ 대신 비워낸 형태를 강조했습니다.
지하에 숨은 분수·환기구를 위로 끌어올려 ‘보이지 않던 시스템(질서)’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기둥이 아니라 기둥 사이 ‘틈’이 광장을 새로 정의한다는 것.
선을 지우고도 공간을 재편하는 힘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었던 작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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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베이컨의 〈프로이드의 초상화를 위한 세 습작〉(1958)입니다.
얼굴을 지워 오히려 프로이드의 불안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세 폭을 가르는 거친 붓질로
형태를 해체해 ‘덜어냄(lessless)’만으로 본질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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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시 에민의 <My Bed>는 침대를 윤리의 무대가 아닌 날것의 사적인 시간으로 돌려놓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보여주시며 이런 작업들을 '방향을 틀어 주는 작은 충격'이라 불렀습니다.
정답을 주지 않고 몸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
그 느낌이 때로는 더 견고한 설계 원칙이 될 수 있음을 전달하셨습니다.
'내 시점'을 지우는 순간
마그리트·마르지엘라가 불러낸 ‘야생적 사고’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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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으로 일할 때는 자기 자신을 한 걸음 밀어내야 경계를 넘을 수 있다.
패션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 "
‘한 걸음 밀어낸다’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감을 잠시 비워 두라’는 뜻입니다.
팀 작업에서 각자의 개성이 전면에 서면 경계(규칙·관습·에고)에 부딪혀 더 멀리 나아가지 못하지만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순간 생각이 겹치고 섞이며 전혀 새로운 접점이 생겨난다는 경험적 조언 입니다.
건축에서 말하는 ‘비움’도 같은 맥락입니다.
설계자가 도면 위 ‘내 시점’을 지우고 과정을 열어 두면 사용자의 몸과 감각이 들어올 틈이 생깁니다.
작가(설계자)의 자리를 비워 둘 때에야 비로소 경계가 허물어지고 공간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성장할 수 있습니다.
도심 속 실험실
세계 각지 사례들. 시선의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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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 위치한 하우메 플렌자의 Crown Fountain입니다. 7 m 높이 LED 타워에 시민 얼굴이 비치고
도시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시민 자신임을 물기둥으로 보여주는 ‘초상화 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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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상하이 엑스포에서 보여졌던 영국관 입니다.
국가의 상징, 기능, 조형 등을 강조했던 타국의 관들과는 다르게 외벽을 뒤덮은 6 만여 개의 투명 아크릴 막대가 뻗어 나가
'정체성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수만개의 씨앗을 품은 비정형 덩어리를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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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들은 기능·의미·외형을 하나로 섞어 놓아 ‘모호함의 미덕’을 눈에 보이게 구현한 사례입니다.
공간이 뚜렷한 용도나 모양을 강요하지 않으니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고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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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은 '건축가가 스스로가 만물의 설계자로 여기지 않을 때
비로소 사용자의 몸짓과 감각에 깊이 집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해 건축가가 틀을 덜어낼수록 공간은 사용자 손에서 더 풍부하게 완성된다는 메시지입니다.
덜어낼수록 자라나는 공간
여백에 삶이 스며들며 공간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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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천 교수님이 직접 설계한 건축물들은 대부분의 공간은 완성된 방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며 관계를 새로 짓는
'열린 틀'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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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바닥·천장을 미는 순간 거실이 서재가 되고 서재가 침실이 되죠. "
교수님이 설계하신 한칸집은 슬라이딩·회전 패널이 재배치 가능한 집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세로 · 가로 방향으로 블록을 덧붙이거나 덜어내 변형 할 수 있도록 하여 용도 프리셋을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방의 용도와 크기는 거주자가 살아가며 계속 다시 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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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천 교수님은 부석사 무량수전을 '경계가 가장 유연한 건축'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앞면이 모두 열려 있어 실내에 있으면서도 풍경이 실외처럼 느껴지고 마루 끝을 넘으면 바로 산과 하늘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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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연이 남긴 건 완벽한 해설서가 아니라 ‘빈칸’이었습니다.
도면 위에 아직 지울 선, 비워 둘 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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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어낸 만큼 가벼워지고 비워 둔 만큼 시야는 넓어집니다.
건축가의 완성보다 사용자의 움직임이 공간을 완성해 나가는 방향으로
비움의 건축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다음 펜을 들 땐 선 하나쯤 살짝 비껴 그어 보세요.
그 틈새로 바람이 드나들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스며들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