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5년 4월 28일 /
장소 : 생각공장 지하1층 세미나실 /
'선의 건축'

오늘은 여러분들과 꼭 나누고 싶은,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고 찾아왔어요.
지난 4월, 저희 한백건축사사무소에서는 김개천 교수님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귀한 시간이 있었는데요.
그날의 주제는 단순한 건축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선의 건축’,
그리고 ‘존재를 드러내는 건축가의 고민’에 관한 깊이 있는 이야기였죠.
교수님의 강연을 듣고 나니, 건축이라는 것이 그저 눈에 보이는 외형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철학과 시선, 삶의 태도까지도 포함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날의 감동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 블로그 글로 정리해보았어요!

강연의 시작은 다소 의외였습니다. 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달마도 한 점에서 시작됐거든요.
이 달마도는 특이하게도 한 번의 행위로 그려낸 그림이라고 합니다.
물론 붓을 딱 한 번만 움직였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리는 사람이 더하거나 덜지 않고, 딱 필요한 만큼만 그리는 것, 그게 핵심입니다.
" 최소한의 행위로, 최대한의 것을 드러내야 한다. "
이 말을 듣고 저는 문득 설계를 떠올렸어요. 우리가 건물을 설계할 때, 의도하지 않은 장식은 빼고 꼭 필요한 공간만 남기면서도
그 안에 기능, 감정, 경험, 의미까지 담아내려고 하잖아요. 그것과 너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얼굴은 거의 스쳐간 듯 그려졌고, 옷자락은 단순한 선처럼 처리되어 있죠.
보통 우리가 아는 ‘인물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상하게도 그 존재감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그림 속 인물은 있는 듯하면서도 없고, 그림은 꽉 차 있는 듯하면서도 텅 비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교수님이 강조하신 "모든 것을 드러내되, 동시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태도이자 방식입니다.
이런 식의 표현은 선의 대표 개념인 ‘공(空)’과 연결됩니다.
공은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말해요.
이어서 교수님은 선의 건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해주셨어요.
선이 단지 종교의 개념이 아닌, 삶의 태도이며 건축의 중요한 철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선의 건축은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1.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조
2. 자연과 관계 속에서 완성되는 공간
3. 비움으로써 모든 것을 담아내는 방식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본의 선 정원(젠 가든)처럼 돌과 모래만으로 구성된 공간에서도
시간과 시선, 감정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듯이 다양한 감각을 품고 있는 공간이라고 하셨죠.
" 작품은 스스로는 고정돼 있지만, 변화 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
김 교수님은 이 말을 통해 건축이 단순히 완성된 구조물이 아니라
변화하는 생명처럼 느껴져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만드는 공간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뜨거워졌답니다.
이제 이야기는 통도사로 넘어갑니다.
통도사는 다른 절들과는 구조가 조금 달라요.
우리가 흔히 절에서 중심에 불상을 모시지만, 통도사에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
즉 실제 유골을 모시는 것을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심 공간에는 불상이 따로 놓여 있지 않았는데요,
오히려 그 비워진 자리가 더 엄숙하고 경건하게 다가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없기에 더 많은 것을 담아내는 공간처럼 느껴졌어요.
또 인상 깊었던 건 바로 불이문이에요.
보통 사찰은 입구에 삼문(三門)을 세워 공간의 경계를 만드는데
통도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김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산의 모습을 가리지 않기 위해
자연을 바라볼 수 있도록 공간을 설계했다는 것이에요.
“건축가는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이 말에서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깊게 드러나는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빛과 그림자, 침묵과 움직임, 경험 그 자체가 하나의 설계가 되는 공간.
그것이 바로 선의 건축이 아닐까요?
강연의 마지막은 부석사 이야기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만 김개천 교수님은
좀 더 특별한 시선으로 무량수전을 바라보셨어요.
바로, 위치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죠.
1. 앞에서 보면 장엄하고 조화로운 모습
2. 옆과 뒤에서는 소박하고 평범한 인상
3. 멀리서 보면 자연과 완전히 하나 된 모습
“정면은 공정하고 크며, 뒷면은 예속되어 보인다. 같은 건물의 다양한 얼굴이다.”
부석사는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고, 자연 속에 자신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명묵의 건축』에서도 “공간은 시선에 따라 해석이 달라져야 한다”고 하셨는데
부석사는 그 말의 가장 좋은 예시 같았습니다.
공간, 생각과 태도를 담는 그릇
김개천 교수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저희는 단순한 설계 이상의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건축은 결국 사람을 위한 공간이며, 존재를 담아내는 방식이라는 것.
그리고 그 공간이 침묵 속에서, 비움 속에서, 관계 속에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감출 것인가.”
이 질문은 아마도 모든 건축가가, 그리고 공간을 만드는 모든 사람이 계속해서 마주해야 할 질문일 거예요.
그렇다면 이 고민의 답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아마도 우리는 그 실마리를 우리 전통 건축과 선의 관계 속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움과 침묵 속에서 말하는 건축,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되새겨야 할 지혜가 아닐까요?